(시 103:10-11)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 아침입니다.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가 지나는 길에 깔아 놓으며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고난 받으러 가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맞았습니다. 하지만 출세도 아니요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오직 한 길, 묵묵히 그 사명의 길을 가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 뿐..
(시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어제 밤 늦게 태어난 지 두 시간 정도 된 새 생명을 보고 왔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웠습니다. 정말 작은데.... 사람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 속에서 열 달 동안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예정일이 되었는데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나올 시간이 되니까 어김없이 태어났습니다. "정한 기한"이 되니까 열 달 동안 살던 엄마의 뱃속을 떠나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수고한 한 여인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여자는 위대하다!...' 열 달 동안 생명을 품고 있느라 수고하고, 해..
(시 101: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다윗의 거룩한 소원입니다. 오직 "완전한 길"을 바라보며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주님 앞에서 다짐하고 있는 소원입니다. 물론 다윗도 살면서 실수하였습니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죄를 주님 앞에서 짓기도 하였습니다.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중심에 "완전한 길"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품고 살았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목동이었을 때도, 쫓겨다니는 신세였을 때도, 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에도, 다윗은 그런 소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 합한 자'(행 13:22)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시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성실"이란 꾸준함입니다. 변함이 없고 일정한 것입니다. 한결같은 것입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아니라,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다 말다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대로인 것, 지속적인 것, 그것이 성실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변함없이 꾸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늘 있는 사람,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하는 사람, 일정한 사람, 변하지 않는 사람, 꾸준한 사람, 그 사람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실은 곧 "믿을 수 있음, faithfulness"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시 99:6)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우리에게도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셨던 예수님, 우리가 받는 모든 시험을 다 받아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분이십니다. 무엇에 약한지, 무엇에 잘 넘어지는지, 욕구가 무엇인지, 어떤 감정이 드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다 ..
(시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편 96편에 이어 "새 노래"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새 노래는 구원받은 새 사람이 언제나 변함없는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따라서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곧 새 노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의문이 생깁니다. 새 사람이라고 어떻게 늘 새로운 마음으로 새 노래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새 노래를 드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아닌데 어떻게 항상 변함없는 새 노래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교훈을 오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이 드리는 새 노래는 현재 내 앞에 있는 상황이나 마음의 ..
(시 97: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할 일입니까? 기뻐할 일입니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같으면 돈과 사람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안됩니다. 이제 다 끝난 것입니다.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변명을 댈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고 정확한 심판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두..
(시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새 노래로 노래하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 새로운 마음으로 노래하라? 늘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한다는 것이 말이 그렇지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새 것을 가져 본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새 차나 새 집, 혹은 새로운 어떤 물건을 갖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새로운 기분이 들고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조금 지나면 처음에 들었던 새로운 마음이 없어지는 것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새 것'이라는 건 없습니다. 새 것 같지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