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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세 번째 '에고에이미' 선언은 "나는 양의 문이다"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 5:2)


바로 이곳입니다.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양을 끌고 들어올 수 있는 문이라 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이라 하였습니다. 



이 양의 문을 들어가면 얼마가지 않아 베데스다 연못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사진입니다. 물론 지금의 모습은 예수님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었겠지요. 



이 연못 가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요 5:3)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각색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도 그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있던 많은 병자들 가운데 제일 병이 중하고 가망이 없어 보이는 38년된 그 병자에게 예수님이 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병자가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저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못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까지는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병을 고쳐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사실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그 전설을 믿고, 언제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지도 알 수 없는데, 그리고 설사 물을 움직이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제일 먼저 들어간다는 보장도 전혀 없는데, 그래도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온갖 병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인데, 어찌보면 정말 말도 안 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희망을 두고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지 않습니까? 고칠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면, 1%의 가능성만 있다고 해도, 무엇이든지 해 보려고 하는 모습이 오늘날도 똑같지 않습니까? 신통하다면, 효험이 좋다면, 사람들이 효과를 봤다고 하면, 어디든, 무슨 방법으로 하든, 누가 하든, 설사 그것이 좀 이상한 집단이든, 심지어 이단이든, 되기만 한다면 어떠냐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오늘날도 똑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정말 고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지금 고친들 다시 병에 들고 말 육신을 위해, 무슨 방법으로 낫게 된들 어차피 조금 지나면 죽게 될 그 육신을 위해, 오직 그 육신을 위해 살아보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똑같이 있는 모습입니다. 


그 당시 많은 병자들이 예루살렘 곁에 있는 그 양의 문을 통해 베데스다 연못을 오갔을 것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 베데스다 연못에 가 있으면 혹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 문을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그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야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들어와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베데스다 연못에 가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38년된 병자를 예수님이 다가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니! 이렇게 쉬울수가! 예수님 한 마디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마디면 38년된 병자도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것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일도, 앞 다투어 제일 먼저 들어갈 일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한 말씀이면 됩니다. 


그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오면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9)


할렐루야! 정말 아멘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 문으로 드나들면 꼴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늘로 향하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리로 가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그렇습니다.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에서도 그렇습니다. 이 문으로 드나들어야 합니다. 답답한 일을 만날 때,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사방이 꽉 막히고 도저히 솟아날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바로 이 문으로 가셔야 합니다. 이 문을 찾아야 합니다. 


이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항상 답이 있습니다. 필요한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이 문으로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문은 결국 우리를 상하게 하고 죽게 하는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당장은 좋아보이지만, 당장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당장은 훨씬 지혜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문을 찾아가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항상 그 문을 향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그러면 답을 찾습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나옵니다. 그러면 평안을 얻습니다. 


'내가 문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살고자 하느냐? 길을 찾고자 하느냐? 답답한 문제가 있느냐?'


'내가 문이다! 이 문으로 들어오라!'


이런 주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보다 더 확신과 평안을 주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갑시다. 날마다 드나듭시다. 날마다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립시다. 날마다 주시는 그 꼴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