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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6:1-15]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3-14절)

멸망해 가는 유다에 큰 역할을 한 자들이 바로 선지자들와 제사장들입니다.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도해야 할 저들이 오히려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 뿌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으로 백성을 안심시키며, 백성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뒤로는 자신들의 탐욕만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입으로는 평강하다, 괜찮다, 아무 일 없다말하지만 실상은 거짓입니다. 사실 저들에게는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가 더 중요합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이 두렵습니다. 맘몬의 우상과 권력과 명예의 욕망에 눈이 가려지고  감각이 마비되어, 그 당시 저들이 하던 일을 오늘날 교회들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이 두렵습니다. 탐욕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음이 두렵습니다.

변질된 복음으로 성도들을 안심시키고, 다른 교회는 어찌 되든 내 교회로만 오면 되고,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의식이 만연합니다. 세속의 가치관 그대로 성공과 실패, 유능함과 무능함을 평가하는 지경입니다.

본질을 추구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방법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시스템과 퍼포먼스와 같은 예배가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보이지 않는 구제보다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의 보이는 구제가 일반적입니다. 상처를 돌봄이 아니라 위장되고 거짓된 보이기 위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평강이요 사랑이요 하나됨일 뿐입니다. 위로와 치료와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더 상처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얻기 위해 교회로 와야 하는데, 오히려 쉼과 평안을 위해 세상으로 가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 평강은 참 사랑에서만 옵니다. 우리의 상처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신 예수님의 참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참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게 하셨고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희생과 죽음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참 평강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랑의 희생을 통하여 주신 평강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도 주님이 주신 그 참 평강으로 상처 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그 평강을 함께 누리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