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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인류 역사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무지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선동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죽이게 하자' 


선동당하는 무리들은 그렇다치고, 선동하고 있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던 최고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장로들도 모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군중들이 소리높여 대답합니다. '바라바로소이다' (21절)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2절)


빌라도도 의아한 일입니다. 아니 어떻게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더욱 소리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절)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인데, 사람들이 그 왕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이냐?' 조롱하면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패까지 부치면서, 그렇게 왕을 죽이고 있습니다. 


왕이신 분이 극악무도한 살인자 바라바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그 살인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아닌 줄 알고 그랬을텐데..., 절대 이런 사람이 메시아일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그랬을텐데...,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분이 정말 왕이시니 말입니다. 그분이 정말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니 말입니다.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라도 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었더라도 함께 소리쳤을 겁니다 아마....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일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유대인이 아닐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생각하면 그 정도로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도 수없이 이런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요? 


바라바냐? 예수냐?


답은 당연히 예수죠. 머리로는 당연히 예수라고 생각하죠. '절대 그럴 수 없죠. 어떻게 바라바를 선택합니까?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합니까?' 라고 머리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매순간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습니까? 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잘못을 저질러야 했습니까? 


첫째,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없이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경배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전혀 없이,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채,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는 그들이었습니다. 전통과 계명과 형식과 습관에 치우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거룩해 보이는 외식적인 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몰라본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맹인이었기에 버젓이 눈을 뜨고도 몰라보았습니다. 다 보고 경험하고서도 몰라보았습니다. 


둘째,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8절)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에는 근본적으로 시기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사람의 시기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시기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더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더 높아지고 인기를 얻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의 속에 있는 그 놈의 시기.... 겉으로는 시기라고 절대로 표현하지 않지만 들여다보면 결국 뿌리는 그것입니다. 


시기가 미워하고, 밀어내고, 편을 가르고, 모함하고, 비방하고, 쫓아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상대가 예수님이어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유 두 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두 가지입니다. 영적 무지와 시기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우리도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욕하고 죽이는데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자, 실제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자, 예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종교생활만 하는 자 그럴 수 있습니다. 정의를 내세우고 옳고 그름을 내세우면서 교회 안에서 싸우고 분쟁하는 자들, 잘 들여다 보면 그런 자들일 수 있습니다. 


시기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시기하여 경쟁하다 보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면, 남이 하는 꼴을 보지 못하고 배 아파 하다 보면, 그런 잘못을 나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영적 무지와 시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이 길을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우리라고 저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도 무지하고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인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원 받았다 하면서, 은혜를 입었다 하면서,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됩니다. 이제는 몰랐다고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핑계댈 이유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더 가까이 주님 모시고 사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세상이냐? 예수냐?


우리의 대답은 오직 '예수'입니다. 암요, 그럼요, 당근... '예수'입니다. 



자꾸... 인사가 늦어지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남은 시간도 주 안에서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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