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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본문: 사 42:18-25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19절)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마치 백성들의 가슴을 부여 잡고 흔들며 외치고 계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들어도 못 듣는 자들아, 보아도 못 보는 자들아, 이제 좀 정신을 차려라, 이제 좀 깨달으라, 너희 눈이 어디에 가 있느냐,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 열린 귀로 무엇을 듣고 있느냐, 어찌 그리 들어도 깨닫지를 못하느냐'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종, 내 사자, 내게 충성된 자, 여호와의 종"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사자라, 충성된 자라 하면서 어찌 그리 맹인이고 귀머거리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그렇게 보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어찌 그리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아들을 부여잡고 안타까워 울부짖는 소리 같습니다. '아들아, 나 좀 봐라, 내 눈을 좀 봐, 내 말을 좀 들어 봐, 너 정말 왜 그러니,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지, 네가 누구인 줄 아니, 너는 내 아들이야, 하나님의 아들이야, 나는 너의 하나님이야, 내가 너의 아버지야'

 

백성들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저들이 회복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저들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지금 이 처지가 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래서 저들이 깨닫고 돌이켜야 하는 그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끝내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었던 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포로 생활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그 역사는 반복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본질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시킬 때에도, 광야 시대를 지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사사시대, 왕정 시대를 지나, 분열 왕국의 역사가 지나갈 때에도,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남 유다까지 멸망을 향해 가는 그 마지막 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셨던 말씀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긴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저들에게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 문제의 본질, 그것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외치고 계시는 회복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입니다. 우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너희를 택한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종이요 사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알고, 제사도 지내고, 율법도 지킨다 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마음은 멀어 있고, 말씀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율법도 형식적인 계명으로만 지키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맹인들아 밝히 보라"

"누가 맹인이냐, 바로 네가 맹인이 아니냐"

"누가 못 듣는 자냐, 바로 네가 귀머거리가 아니냐"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잘 본다 할 수 있습니까? 잘 듣고 있다 할 수 있습니까? 자기도 못 보면서 왜 보지 못하느냐고 남들에게 큰 소리 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기도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너희들이 바로 맹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지킨다고 하는 저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하는 저들, 자신들은 잘 하고 있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가르치는 저들, 누구보다 맹인이면 안 되는 저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가 바로 맹인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 15:13, 14)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우선시 되는 것, 전통이나 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 내용 없는 형식이 강조되는 것, 그것이 맹인이 되어가는 현상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데, 잘 하고 있고,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맹인이 길을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심에서 벗어난 비본질과 껍데기 뿐인 형식과 전통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전통과 형식에 매이게 하는 것, 그것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인 수준에서만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 말씀의 영적 실상을 보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설명하는 것, 그것도 맹인이 맹인을 가르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 생각하는 자가 더 그럴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을 안다 가르치는 자가 더 그럴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 했고, 남들보다 더 기도한다 하는 자가 그럴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이 아닌가 살펴야 합니다. 나는 안다 할 수 있는 자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늘 겸손하게 엎드려 오늘도 정결하게 씻어 주시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말씀을 귀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글로 쓰인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적 실체를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아니라 하지 맙시다. 나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붙드시는 은혜가 아니면 바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자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