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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주님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울지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아침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독자입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과부의 신세인 것도 불쌍한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습니다. 


경험하지 않고는 그 심정을 다 알 수 없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캄캄해지고, 살 소망이 끊어지는 그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그 울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들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을 따라가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울었습니다. 


그때 마침, 주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주님이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과부의 그 심정을 주님께서 함께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과부에게 가까이 오사 하염없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손을 내밀며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그리고는 죽었던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관에 넣어서 장례를 하러 가던 죽은 아들을 그 자리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천국에 보내고 우는 분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신 것을 아는데, 조금 후면 다시 만날 것을 아는데, 그래도 생각하면 울음이 납니다. 


늘 옆에 있던 남편인데, 지금이라도 부르면 대답하며 나올 것 같은 남편인데, 옆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혼자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울음이 납니다.


병에 걸린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와 우는 남편이 있습니다. 남들 다 일어난 빈 예배당, 아내의 옆자리에 그대로 앉아 일어날 줄 모르고 웁니다. 이렇게 함께 앉아 예배드리기를 아내가 그토록 기도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작 그랬으면 좋았을것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미어집니다. 병든 아내를 고쳐 달라는 애원하는 마음에...., 남자의 얼굴에 울음이 납니다. 


오늘 누가복음 7장에는 우는 여인이 또 한 명 나옵니다. 죄를 지은 여자라고 했습니다(37절). 그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 그 발 곁에 서서 웁니다. 얼마나 우는지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주님 앞에 서면 그냥 울음이 나는 겁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그 무한한 은혜 때문에, 그냥 눈물이 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 벌레만도 못한 나 같은 죄인을, 내가 무엇이라고, 아니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정말 십자가가 믿어진다면, 나를 위해 그러신 것이 믿어진다면, 예수님 앞에 서서 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감사해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감격해서 울고, 염치없어서 울고....., 알면서도, 믿는다 하면서도, 이렇게 밖에 안되는 나 자신의 못난 모습 때문에 울음이 납니다. 다른 일로는 울지 않는 남자의 눈에도 예수님 앞에서는 울음이 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7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울지 않는 자들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2절)


당시에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하던 놀이입니다. 어떤 아이가 피리를 불면 모두가 일어나 춤을 추어야 합니다. 누군가 곡을 하는 시늉을 하면 모두가 함께 울어야 합니다. 그런 놀이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곡을 하여도 울지 않습니다.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꼼짝을 안하는 것입니다. 피리 소리가 나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함께 울어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1절)


강팍한 심령들, 돌같이 굳은 심령들, 꽉 닫혀 있는 심령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심령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고도,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듣고도 못 듣는, 보고도 못 보는, 만지고도 느끼지 못하는,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보고도 못 믿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도 울음이 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떳떳한 자들입니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울고 있습니다. 그것도 뒤에 살며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울지 않는 자보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하)


울고 계십니까?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 계십니까?


예수님 앞에 서면 그냥 울음이 나십니까? 


은혜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혹은 못난 나 자신 때문에 울음이 나십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 있는 자이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울지 말라....


울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내가 너의 아픔을 아노라, 내가 너의 슬픔을 아노라...


울지 말라....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울게 하신다면 내일은 웃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울어야 하기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야 하기에.... 오늘은 울게 하십니다. 내일 웃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은 울게 하십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슬퍼하는데, 그동안 오래 기도하던 아들이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옵니다. 그 아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열립니다. 


그토록 가자고 해도 꿈쩍 않던 남편이 병든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옵니다.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슬픔 후에 웃는 사람들, 고통 후에 웃는 사람들, 환난 후에 웃는 사람들, 아픔 후에 웃는 사람들...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를 계속 울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는 동안 주님도 함께 울고 계십니다. 우리보다 더 울고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울고 계십니다. 


울지 말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의 따스한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힘 내십시오.


오늘은 울지만 내일은 웃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