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오늘 마태복음 18장에는 연약한 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죄를 범한 자, 빚을 진 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연약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냥 뻔한 말씀으로 가볍게 듣고 지나갈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라, 실족하고 넘어진 자들에게 잘하라, 아흔..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다고 해서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왜 제자들을 세 명만 데리고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로운 장면을 12제자 모두에게 보여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도 이들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 주위에 12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모두가 다 같은 제자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특별히 더 가까운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변화산..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 세 가지가 오늘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첫째, "내가.... 세우리니"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건물도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세우십니다. 교회를 이 땅에 시작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2000년 역사 동안 그 생명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온갖 환난과 핍박에도 교회의 생명이 이어져 왔습니다. 각각의 지역 교회들은 세워졌다 조금 지나서 없어지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생명은, 또 다른 교회를 통해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 생명을 이어받아 오늘날..
(마 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지적하신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맹인인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맹인인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 모르면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격도 안되는 사람이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을 영적 맹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통의 문제를 가지고 또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
(마 14:10-11)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 말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요, 이 세상에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세례요한인데,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까? 구약의 엘리야처럼 멋있게 하늘로 올려가셨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광야에서 천국 복음을 외쳤던 선지자인데, 마지막의 모습이 마음을 참으로 안타깝게 합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 재난 사고들, 불의한 죽..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보이는 자, 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다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13절). 귀로 듣고는 있는데 깨닫지를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는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합니다(14절). 마음이 완악하여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강팍해진 마음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돌이킬까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15절).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깨달아진다면 복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귀에 들릴 뿐만아니라, 그 말씀의 실상이 ..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말입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에 대하여 논합니다. 안식일에 이런 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안식일을 이렇게 범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회당입니다. 그곳에서도 안식일에 대하여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정당한 질문입니다. 왜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치냐는 겁니다. 내일 고쳐도 되는데 왜 하필, 안식일을 범하면서 병을 고치냐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장과 전통의 기준에서 보면 맞는 주장입니다. 지킬건 지켜..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내려놓아지지 않는 짐들이 있습니다. 변한 것이 없는데, 환경은 그대로인데, 문제는 그대로인데,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으라는 것입니까? 마음에서 내려놓는다고 평안해집니까? 앞에 있는 상황은 그대로인데요. 내려놓아야지, 주님을 의지해야지, 주님만 바라봐야지...., 수없이 다짐해 보지만, 잠시뿐...., 현실에 부닥쳐 살다보면 짐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변하는 것은 없고, 마음의 쉼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과 현실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참된 안식을 누릴 ..